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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홍보팀 유미안씨. 알어?” 놀라는 것과는 달랐다. 하지만 창 밖의 모든 것이 순간 보이지 않았다. 홍보실장이 건네는 커피는 유난히 찰랑거렸고, 그래서 거짓되어보였다. 하긴 인스턴트 커피는 거짓으로 가득하다. 그 자체로 커피를 흉내 낸 조악한 액체일 뿐이다. “이주일 전에 홍보팀에 발령 온 여자. 너랑 좀 안다던데?” “네. 알아요.” “이번에 좀 중요한 프로젝트라서 말야. 디자인을 유미안씨한테 의존해도 될지 확신이 안서서.” 홍보실장은 의심으로 가득한 사람이다. “유미안씨. 어떤 거 같어?” “구체적으로 어떤 점을 말씀드려야하죠?” “뭐...감수성?” 감수성. 그녀처럼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 있을까. 유미안은 눈물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적은 편도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눈물을 흘리고 싶어 하지 않을.. 더보기
지난 밤 꿈이 아름다워서 하늘이 검게 멍든 것 같았지. 지난 밤 꿈결 어름에 가슴을 태우며 지나가는 시간 이야기 속 눈물처럼 잊혀질 일들이 아닌 걸 알았지. 손목에 앉은 이야기 어느새 지탱할 수 없게 된 걸음 말라버린 웃음처럼 내게 모든 건 다 지난 이야기 모든 것이 꿈인 것 처럼 전설이 슬퍼질수록 변함없이 기억되듯이 더보기
강아지 이야기 강아지 두 마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서늘한 밤 노란색 가로등 아래서였다. 꼬마는 그 두 마리의 강아지를 가만히 관찰했다. 한 마리는 누런색 잡종이었고 한 마리는 데이지 색 치와와였다. 데이지는 잡종에게 계속해서 뭔가 말했다. 누런 녀석은 풀이 죽어 귀를 늘어뜨렸다. 꼬마는 데이지가 더 기가 센 짝이라고 생각했다. 누런 녀석은 가만히 풀 죽어있었다. 누렁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러다 누렁은 슬그머니 일어났다. 그리고 떠나버렸다. 몇 번 돌아보나 싶더니 그렇게 했다. 데이지는 돌아서는 누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거리에서 누렁이 자취를 감추고 데이지는 남았다. 데이지는 슬피 울었다. 꼬마의 볼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렸다. 더보기
감사 그 여자는 매력적인 감각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꽤 오래전에 알던 사람이었는데. 정말 오랫만에 마주쳤어요. 많이 예뻐졌더군요. 오랫만에 인사를 나누고, 서로 시간이 많았던 공휴일이라서 그냥 밥을 사줬습니다. 사람들이 복작거리는 거리를 걸으면서, 그 여자를 잃어버릴까봐 계속해서 뒤돌아봤어요. 졸졸 잘 따라오더군요. 내가 뒤돌아 볼 때마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더군요. 부정하고 또 부정했지만...시가지의 인파속에서 그녀를 아끼며 걸을 때, 내 사랑은 조금씩 커졌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일식집에서 초밥을 약간 사주고, 대화를 나눴습니다. 붉은 전등이 은은한 고급 식당이었습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다 기억나지는 않네요. 많은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그 여자는 내 말을 잘 들어줬습니다. 그 여자에게 .. 더보기
깊은 숲 끝없이 깊은 숲은 끝을 만들어내지 못한 신의 실수로 만들어졌고 나는 그 숲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숲은 꽃과 나무와 바람들로 가득차 있었고 빛은 알갱이처럼 굴러다녔다. 나는 끝없이 숲 안으로 빠져들어갔다. 그곳은 지독하게 아름다웠다. 70년 남짓의 세월은 내 수명의 길이와도 비슷해서 내가 숲을 걸어들어갈 수 있는 시간과 거리는 70년 즈음의 거리와 비슷할 터였다. 그리고 70년 동안 지독한 아름다움 속을 헤매던 나는 결국 힘을 잃었고 쓰러져 내렸다. 내가 쓰러진 곳에는 해골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최선을 다해 70여년을 걸어온 사람들이 모두 거기에 죽어있었다. 그 너머의 아름다움에는 사람이 닿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숲은 세상에 있을 수 없다. 신의 실수가 아니고서는. 더보기
외면 사람들이 밤에 길거리로 나와 하늘을 바라보고있었다. 저마다 '달이 아름답다' 라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달을 보려 했지만 달은 보이지 않았다. 달은 없었다. 나는 갸웃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알게되었다. 달이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달이 오직 내게 빛을 드리워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베란다에 서서 달의 아름다움에 취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텅 빈 하늘을 확인했다. 나는 그 자리에 있을 달을 상상했다. 사방에 내려앉은 달빛을 보며 다만 달의 향기라도 맡았으면 했다. 달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어서 밤새 술을 마셨다. 더보기
느와르 나는 차에서 내렸다. 말없이 운전만 하던 까만 양복의 남자도 뒤따라 내렸다. 나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맑은 하늘이었다. 까만 양복이 내 뒷통수를 냅다 후려쳤다. "아욱" 눈 앞이 크게 흔들렸고, '띵' 하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뒷통수에 뜨거운 작열감이 일었다. 목덜미를 타고 피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까만 양복은 호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건 자그마한 권총이었다. 나무냄새가 진한 바람이 불었다. 이렇게 한적한 숲이 있다니. 이런 곳이 있는줄 알았다면, 매년 여름 피서를 왔을텐데. 까만 양복은 내 왼쪽 눈에 총구를 갖다대었다. 내 눈앞의 세상 반절이 까만 총구로 가려졌다. "조상현씨. 맞지?" "...네." 바람이 분다.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피는 멈추지 않았다. 뒤통수 껍데기만 아픈게 아니라 두.. 더보기
꽃이야기 이 이야기는 2492년 한 유전공학자의 일기다. 특이하게도 존댓말로 자기고백을 하고있다. 그는 몇송이의 계량품종 화초를 개발했고, 그 업적은 세기에 길이 남을 정도는 아니었더라도 쓸만한 정도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는 자기 생애 최고의 작품이자 최후의 작품을 개발하고 연구생활을 끝맺었다. 그는 은퇴이후 작은 꽃집을 경영하면서 소박하게 살다 죽었다. 이 일기는 최후의 작품이었다는 한 유전자 조작 화초에 대한 고백이다. *성취에 대하여-2492년 10월 25일. 나는 연구에 몰입해 있었습니다. 아이디어가 딱 하나 떠올랐었습니다. 최근 나는 화초의 '생존목적'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생존목적이라는 것은 참 특별한 개념입니다. 과연 생존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인간은 왜 사는 것.. 더보기
정신병자. "제가 갑자기 나타나서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낸 것이 불쾌하실지 모르겠지만, 부탁입니다. 그냥 삼십분만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나면, 저는 떠나가겠습니다. 뭐 경찰에게 잡힐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이 커피숍에서 나가자마자 곧장 자살을 할 예정입니다. 약을 먹던지 목을 매던지 뛰어내리던지, 그런 것들 중에 아무거나 하나 하는 겁니다. 뭐 어떻게 죽을지는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오늘 새벽에 내가 사고를 낸 직후, 난 자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렇게 경찰을 피해 다닌 것은 아무래도 그들은 내가 원하는 순간에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목숨을 끊기 전에 그냥 아무한태나 제 이야기를 해주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러니, 부디 절 너무 욕하지 마.. 더보기
변주2 - 는다는다는다 갖고 싶은 것과 그대로 두고 싶은 것이 같을 때 보이고 싶은 것과 숨기고 싶은 것이 같을 때 흔들고 싶은 것과 고요히 두고 싶은 것이 같을 때 팽팽해서 안정적인 것과 팽팽해서 안타까운 것이 같을 때 그 모든 것이 더이상 어떤 식으로든 팽팽할 수 없을 때 도망칠 수도 도망치지 않을 수도 없을 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