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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그 여자는 매력적인 감각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꽤 오래전에 알던 사람이었는데. 정말 오랫만에 마주쳤어요. 많이 예뻐졌더군요. 오랫만에 인사를 나누고, 서로 시간이 많았던 공휴일이라서 그냥 밥을 사줬습니다. 사람들이 복작거리는 거리를 걸으면서, 그 여자를 잃어버릴까봐 계속해서 뒤돌아봤어요. 졸졸 잘 따라오더군요. 내가 뒤돌아 볼 때마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더군요. 부정하고 또 부정했지만...시가지의 인파속에서 그녀를 아끼며 걸을 때, 내 사랑은 조금씩 커졌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일식집에서 초밥을 약간 사주고, 대화를 나눴습니다. 붉은 전등이 은은한 고급 식당이었습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다 기억나지는 않네요. 많은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그 여자는 내 말을 잘 들어줬습니다. 그 여자에게 친절할 수 있었고, 저에게는 꽤 괜찮은 밥을 사줄 돈도 있었죠. 다행히도.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었습니다.옴작이면서 초밥을 씹던 입술이 아찔할 정도로 여렷습니다. 그 여자가 웃음을 주체하지 못해서 물잔을 쏟을 때는 눈물이 날 것만 같더군요.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자극이었고, 감동이었습니다.그런 감정은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에 흥미를 갖고 깊이까지 이해해 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아내와 처음 만났을 때의 기분이었습니다. 너무나 오랫만에 느끼는. 나는 그때 젊음을 실감했습니다. 내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불현듯 느꼇습니다. 아, 물론 아직 나는 젊습니다. 서른여섯이라는 나이는 어떤 측면에서는 젊은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미지의 낭만으로 가득했던 사춘기는 흘러간 지 이십년이 되었습니다. 머리도 좀 많이 빠지고 있죠.
나이에 비해 빠른 승진을 했고, 연봉의 액수에도 자신만만한 저이지만.
그때서야 문득 깨달았던 것이지요. 작은 사랑에 가슴 떨려하던 시절이 있었고, 그 감정을 잃어버린지 오래 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그리고 또 하나, 지금의 내 아내는 그 감정을 결코 되살려 줄 수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아쉬운 일이지만, 현실을 거짓없이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정말 오랫만에, 내 마음 구석에 오랫동안 죽어있던 뭔가를 깨워버린 느낌이었습니다. 그 여자가 말이죠.

그 여자가 과연 나를 좋아할까. 나는 그런 조바심과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과연 그 여자에게 내가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을까. 그냥 친절한 아저씨 정도로 기억되는 것은 아닐까. 내 차가 아무리 고급이고, 내 직함이 아무리 앨리트직이라고 해도, 물론 그게 근사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녀 또래의 젊은이는 아니었으니까요. 마흔을 앞둔 나는 그런 생기와 민첩함, 또는 뻔뻔한 유머감각 따위 사라진 지 오래되었으니까요..돈으로 그녀의 마음을 살 수 있다 하더라도...그건 사랑받는게 아니니까.

다음은 술집이었습니다. 카페같은 술집에서 우리는 약간의 과일주를 마셨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당시에 공부를 하고있던 그 여자는 영국의 역사에 약간 관심이 있었고, 이탈리아의 천재들을 신봉하고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지적이고,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우리는 다빈치가 스파게티를 발명한 것과, 귀도레니가 베아트리채를 그릴 때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온통 가득했던 그녀와 술향기가 나를 행복하게하고, 또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그때 만큼은 10대 또는 20대 초반의 나로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목소리도 높아졌고, 표정도 아이같이 변했던 것 같습니다.

물리학자 니콜라테슬라의 순수성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녀의 커다란 동공에서 발하는 눈빛이 내 눈빛을 피하지 않을 때, 그 술집의 푸르스름한 조명과 향기와 그 모든 것 때문에, 나는 니콜라테슬라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뿐인데,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리더군요. 

그 여자는 깜짝 놀랐고, 나는 내가 이렇게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비롭게 느껴졌습니다. 그녀가 눈물을 닦아주었고, 나는 얼굴을 스치는 손길을 느꼈습니다.
그만 둬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대로 사랑에 눈 멀어서..중요한 것들을 내팽겨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래전에 죽어버렸던 내 안의 뭔가를 깨워버린 그 여자가 사랑스러웠지만 그 이상의 뭔가가 있어선 안될 것 같았습니다.
내 얼굴에서 눈물을 훔치는 그녀의 손을, 나는 지그시 잡았습니다. 그 여자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왜 눈물을 흘리는지, 지금의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여자는 다 알고 있는것 같았습니다.

"이제 우리 그만 나가요."

마침맞게도 그녀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쓸쓸하게 웃더군요. 나는 계산을 하고, 그 여자와 밤길을 걸었습니다. 찬 바람이 기분좋게 천천히, 술을 깨웠습니다.
그 여자는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남자친구는 생길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나는 그 여자의 아파트까지 갔습니다. 그 아파트의 밴치에 잠깐 앉아서 이야기를 더 했습니다. 그 여자도 헤어짐을 아쉬워했습니다. 가로등 아래서 우리는 어린 시절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그녀를 들여보내고, 나는 집으로 왔습니다.

나는 깊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를 우연히 만난 거리와, 일식초밥과, 그녀가 쏟은 물잔과, 술 향기와, 그녀 아파트의 밴치를 모두 잊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깨워버린 내 안의 뭔가는, 아직도 잠들지 않고 있습니다.

아내에게 베아트리채와 귀도레니에 대해 이야기를 했지만, 금새 지겨워 하더군요.
그렇다고 아내를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가끔은 결혼제도가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못견디게 싫은 것은 아닙니다. 

내가 40년 정도 뒤에 늙어서 죽는 자리에서도
그 날을 생각하면 조금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 사람에게 감사합니다.



2007/03/03 1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