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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홍보팀 유미안씨. 알어?”

 

놀라는 것과는 달랐다. 하지만 창 밖의 모든 것이 순간 보이지 않았다.
홍보실장이 건네는 커피는 유난히 찰랑거렸고, 그래서 거짓되어보였다. 하긴 인스턴트 커피는 거짓으로 가득하다. 그 자체로 커피를 흉내 낸 조악한 액체일 뿐이다.

 

“이주일 전에 홍보팀에 발령 온 여자. 너랑 좀 안다던데?”

 

“네. 알아요.”

 

“이번에 좀 중요한 프로젝트라서 말야. 디자인을 유미안씨한테 의존해도 될지 확신이 안서서.”

 

홍보실장은 의심으로 가득한 사람이다.

 

“유미안씨. 어떤 거 같어?”

 

“구체적으로 어떤 점을 말씀드려야하죠?”

 

“뭐...감수성?”

 

감수성. 그녀처럼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 있을까. 유미안은 눈물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적은 편도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눈물을 흘리고 싶어 하지 않을 뿐, 울음을 참아 가슴 안을 눈물로 채우는 그런 여자였다.

 

“감수성이 풍부하죠.”

 

지난해 겨울이 생각난다. 그 어떤 기념일도 아닌 어느 날. 달력 위에 아무것도 표시할 필요도 없는 검정 숫자의 날에 나는 예기치 않은 선물을 받았었다. 그건 손으로 뜬 양말이었다.

 

“야. 이거.”

 

유미안은 뭔가 둥글둥글한 것을 내게 툭 던지듯 내놓았었다.

 

“뭔 대?”

 

“발 장갑. 웃기지.”

 

그녀가 건넨 ‘발 장갑’이라는 녀석은 알록달록 너무나 귀여워서 발에 도저히 끼고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근데 왜 왼쪽밖에 안줘?”

 

“음...”

 

“오른쪽도 줘야 끼고 다니지.”

 

그녀는 나머지 오른쪽을 등 뒤에 감추고 있었다.

 

“내가 이거 주면 너 아무 말 하지 말고 나를 꽉 안아주면 돼. 알았지?”

 

“하...참. 그래. 그렇게 할게. 주세요.”

 

그녀는 나머지 오른쪽을 내 손에 쥐어주면서 급하게 내 품으로 뛰어 들어왔다. 오른쪽 발 장갑 안에는 작게 접은 종이학과 종이 별들이 가득 차 있었다.

 

“유미안씨를 디자이너로 쓰면 나쁘진 않을 거예요.”

 

“그래? 근데 팀원과 잘 어울릴까? 얼마 전에 칭찬을 했는데, 내가 말하는 도중에 ‘네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내 말을 끊고 나가버리던데...”

 

유미안은 그런 여자였다. 이상스러울 정도로 부끄러움이 많았던. 그날 종이학으로 채운 발 장갑을 건네면서 나를 끌어안았던 것도, 얼굴을 마주보기에는 너무나 부끄러워서 그랬던 것이다.

 

“능력 있는 여잡니다. 부끄러움이 많고, 겁이 많아서 그러는 거예요. 질책 앞에선 강하지만 칭찬 앞에선 너무 약해져서 그러는 거라서. 무례하거나 오만한 타입은 절대 아니구요.”

 

“그렇구만.”

 

분명히 그런 여자였다. 내가 아는 유미안은. 그리고 무례하게 행동할 줄도 몰랐다. 무례하지도, 모질지도 못해서. 그날 그녀는 내게 너무나 많은 눈물을 보였었다. 그녀의 가슴이 눈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

 

“해어져야겠어.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자연현상이다. 그 자연현상 와중에, 다른 사람을 마음속에서 밀어내는 것도 자연현상이다. 그리고 보통, 애인을 차는 것은 전화로 하는 것이 가장 편하다. 특히 유능한 여자는 그런 식이다.

 

“정말 미안해.”

 

그녀는 내가 질려서 등 돌리고 먼저 떠나게 만들 정도로 용서를 빌었다. 간곡하고 간곡하게. 나는 그녀의 사과 때문에 더 비참해졌다. 그렇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서도, 나를 차야할 정도라니. 내가 싫어진 마음이 저토록의 미안함 보다도 더 크다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사람과도 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홍보실장이 입술을 삐죽인다.

 

“부끄러움이 많다라...그게 너무 많아도 문제 아닌가. 한동안 같이 특별 팀으로 움직여야 할 텐데. 나는 껄끄럽지 않은 관계를 원하거든.”

 

“적절히 그 사람을 부끄럽지 않게만 대해주면 됩니다. 인간관계 좋고, 대인기피 같은 건 전혀 없어요. 오히려 남들을 배려하길 좋아해서 집단에서...사랑받는 편이예요.”

 

나는 ‘사랑받는’을 말하는 게 유난히 어려웠다. 그래. 그녀는 사랑받을 만 하다. 사랑받아야 한다.

 

“그럼 이건 비밀인데 말야.”

 

홍보실장이 목소리를 낮춘다.

 

“나랑 사귀는 건 어떨 거 같나?”

 

‘빌어먹을. 이것이었나...’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가 저돌적일 정도의 순수라면, 홍보실장은 구깃구깃한 비닐봉투처럼 부질없는 거짓으로 가득하다. 오늘의 대화처럼, 모든 사소함에 거짓된 잔머리를 굴리는 홍보실장을 더 징그럽게 느껴진다.
한숨이 나왔다.

 

“처음부터 그걸 물어보시지 그러셨어요...”

 

“아니. 참. 나도 부끄러워서 그런 거지.”

 

소심한 녀석. 그녀가 그렇게 말을 끊고, 등을 돌려 나가버린 것이 자신을 싫어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의 좁아터진 마음에 앙금처럼 남은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예쁜 건 알아서, 평소에 말조차 걸지 않던 내게 커피까지 건네준 모양이다.

 

“저랑 유미안씨랑 사귀었던 거 알고 물으신 거죠?”

 

“아냐. 몰랐어.”

 

손사래를 친다. 정말 몰랐다면 ‘아, 자네 유미안씨랑 애인이었나?’ 라고 했겠지.
그의 쓸데없는 잔머리는 얄팍해서 더 미웠다

 

“죄송합니다. 전 잘 모르겠네요.”

 

홍보실장의 얼굴이 굳어진다. ‘아 그럼요. 유미안이 꽤 괜찮잖아요. 잘 해보세요.’ 같은 대답을 원했겠지.

 

“두 사람이 말이 잘 통할지는 좀 의문이네요.”

 

나는 쓰레기통에 반쯤 남은 커피를 집어던졌다.
홍보실장이 입술을 꽉 다문다.

 

‘빌어먹을.’

 

저런 비에 젖은 비닐봉투 같은 놈과, 종이학으로 가득 찬 발 장갑이 사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 우리가 좀 안 맞아 보이나?”

 

“아뇨.”

 

나는 일어서서 바지를 털며 말했다.

 

“유미안씨는. 좀 귀한 여자라서요.”

 

날 차버린 여자를 변호하는 게 못나게 느껴졌다. 게다가 홍보실장을 상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천하의 못난 놈이 될 거 같았다. 그러나 이 이상은 어떻게 할 수 없다.

홍보실장의 웅크린 마음이 꿈지럭거리는 것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춥네요. 발이 시려서 저는 들어가볼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