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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Day

정말 어릴 적.

많이 어릴 적에 버스를 탈 줄도 모를 때. 오직 버스의 박스 안에 돈을 넣으면 된다는 것만 알았을 때.
버스를 타고 친척집에 가려다가 정류장을 지나치고 말았지.
내려서 돌아가야한다는 생각을 못했어. 나는 딴 생각에 빠져 이미 몇 개의 정류장을 지나와버렸고
창 밖은 생전 처음보는 낯선 풍경들.
내려서 반대방향으로 타면 괜찮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내 호주머니엔 땡전 한 푼 없었다.

나는 버스란 노선을 뱅글뱅글 도는 건줄 알았다. 가는 버스와 오는 버스가 똑같이 생겨서.
그래서 무작정 한바퀴 돌아서 친척집으로 갈 때 까지 기다렸다.
낯선 지역의 낯선 도로.
나와는 무관한, 나에게 무관심한 세계 속으로
나는 처음 혼자 들어가봤던 거였다.

처음 가보는 동네의 건물 간판들은 너무나 낯설었다.
간판들은 하나도 예뻐보이지 않았고 죄다 시무룩했다.
그렇게 길게 한바퀴 뱅 돌아서 집으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종점'이라는 미지의 세계에서 버스는 멈춰섰고
모두 내렸다. 너무나 당연한 듯 다들 내렸다. 
'너도 이제 내려야한다' 라고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남아있으면 바보처럼 보일 거 같아서 내렸다.
버스 기사도 내렸다. 버스 기사가 내리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종점이라는 곳은 참으로 기이한 곳이었다.
버스란 언제나 달리는 것이고 어디 주차되어있는 것을 본 적 없는데
그 곳에는 십여대의 버스가 얌전히 멈춰 있었고
버스는 잠든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그저 덩그라니 놓여진 물체였다.

버스에서 쫓겨나서 나는 완전히 낯선 곳에 가만히 섰다.
뻗은 길은 너무나 많았고, 어느 쪽이 우리집 방향인지 알 수 없었다.
키우던 강아지에게 밥을 주지 않았던 기억이 났다. '두리'를 생각하니 눈물이 나왔다.
그낭 걸어야 했다. 종점은 더이상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호스로 버스에 물을 쏘아대는 기사아저씨가 일에 열중해 있었다.
아니 모든 사람이 자신의 관심사에 열중해 있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사람들에게 섭섭함을 느꼈다.

걷고, 걷고, 또 걸었다. 바다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내가 이 동네를 헤매는 것은 합법적인 일이었지만 잘못된 것이었다.
동네 강아지들의 털은 보드라와 보였지만
왠지 나로서는 침투할 수 없는 한없이 딱딱한 세상이었다.

'모노륨'이라고 쓰여진 장판가게가 있는 동네를 떠돌던 기억이 난다.
그 옆에 '상일가구'도 있었다. 나는 상일가구와 모노륨이 있는 동네를 정처없이 걸었다.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다니다보니 한바퀴 돌아서 다시 상일가구와 모노륨이 나타났다.
이상하게도 반가웠다. 상일가구와 모노륨을 멀리 벗어나면 안될 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 곳에 머물러봤자 집은 없다. 아무것도 붙잡을 것이 없다.

헤매다보니 내 운동화 끈이 풀렸다. 나는 끈을 묶을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나는 풀린 끈을 내버려둔 채 걸어다녔다.
허름한 여관 안에서 껌을 씹으며 TV를 보는 아줌마가 있었다.
그 동네에서 가장 냉랭하게 자기 일에 열중한 사람이었다. 김수미를 닮았었다.
나는 김수미를 볼 때면 가끔 그때 모노륨이 있는 동네의 여관 속 딱딱한 아줌마를 떠올린다.

어떤 아저씨가 나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신발 끈을 묶으라고 했다.
나는 신발 끈을 묶었다.
아저씨가 '어디 사는 누구냐'라고 물었다.
북정동 사는 상현이라고 대답했다.
왜 여기까지 왔냐고 물었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아저씨가 백원짜리를 여섯개 줬다.
5-1번 버스를 타면 집으로 갈 수 있다고 했다.
나는 토라진 표정으로 돈을 받아 호주머니에 넣었다.

이제야 말을 걸어준 세상에게 나는 토라져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아저씨는 너무나 고마운 사람인데
나는 뒤늦게야 사과를 하며 동전을 건네준 세상에게 화가 났다.

그리고 다시는 버스를 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우리 엄마는 그런 거 안 타고 살아도 된다고 나를 어르고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