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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Day

침묵 앞에서


나는 미로 속에 버려져 있었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서

아무 방향이나 걸어야 했다.

때로는 뛰었다.

하늘에 달이 떠 있었다.

달의 깃털들을 맞으면서

애써 즐거운 척 했다.

 

난 착각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즐거움을 만나면

나는 즐거워지지만

내가 즐거운 척 한다 해서

세상이 즐거워지는 것은 아닌데.

 

적절치 못한 나의 몸부림을

세상이 몰랐으면 했다.

그런데 미로가 말을 걸어왔다.

 

"넌 길도 알 수 없는 이 곳에서

어떻게 혼자

그렇게 즐거운 척 하니?"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달에는 애당초 깃털이 없었고

미로에 갖힌 자에게 어울리는 것은

풀죽은 우울함 뿐이었다.

 

세상 누구도 속지 않은 거짓.

나 혼자 속고 싶었던 거짓.

나라도 속고 있다고 믿고 싶었던 거짓.

 

기나긴 침묵 앞에선

김광진의 편지를 부르기로 생각했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마따나

말해질 수 없는 것은 말할 수 있는 것 보다

의미심장한 법이다.

나는

님의 침묵 앞에서

억지부리지 말았어야 했다.

 

그렇게 나는 싸구려가 되어갔다.

이제 나를 주워담으려 하니

손에 잡히는 잔해들은 너무나

값 싼 것들 뿐이다.

 

모든 것에 대해서

머리가 터질 것 같이 화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