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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튼 생각

김씨 표류기의 자장면

<김씨 표류기>에서 주목했던 대사.
"자장면은 저에게는 꿈입니다."

단순하게 보면 단순하지만
복잡하게 보면 복잡하다.
그리고 섬짓하다.

사람을 살게 하는 꿈. 그것은 자장면일 수도 있다.
달리 말해, 꿈은 꿈이기만 하면 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욕망의 대상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존재만이 문제가 된다.

결국.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욕망은 허상이 될 수도 있다.
욕망이 인간을 추동한다면.
욕망의 대상이 그 무엇이 되든. 빌딩이 되든, 부자가 되든, 소설가가 되든, 
혹은 단 한 그릇의 자장면이든.
그것이 인간을 살게 한다면.
꿈은 그 자체로 족한 것인가.

내가 꾸어온 꿈. 간추리면 '예술하는 학자' 였다.
오직 '취직'하겠다는 꿈에 매달리는 친구들을 한심스럽게 생각한 적 있다.
오직 '돈'벌고 싶다는 꿈에 집착하는 친구들을 안타깝게 생각한 적 있다.
그러나 그들의 꿈이 무엇이든 중요한 게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오직 자장면이 꿈인 사람도 있다.
그는 새의 똥 속에서 씨앗을 찾아내고,
처음으로 밭을 일구어내는 기염을 토했고
자장면을 먹으며 어쩌면 생애 최고의 감동을 맛봤다.

그것으로 족하다면.
꿈에는 정말로 귀천이 없어진다.
꿈에 귀천이 없다면
다시 말해, '좋은 꿈'이라는 것이 없어진다.
그렇다면
인구의 수와 지구와 공존을 생각한다면
소박할 수록 좋은 꿈이 된다.
우주여행의 꿈? 개척의 꿈? 이런 것들은 결국 자장면 한 그릇과 등가물이 되고
그러한 대규모의 화려한 꿈은 세상을 소비한다는 점에서 골치아픈 존재가 된다.
화려한 스타를 꿈꾸는 사람들은 타인의 열등감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골치아픈 존재가 된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 가치있는 것이 아니다.
꿈은 하나의 '기호 선택'.
꿈이라는 것은 결국 화려함에 신화 속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성립할 수 있다.
누구나 쉽게 하는 말이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말.
"꿈을 크게 가져라"

이 말은 개 뻥이다.

문제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거?
뒤엉킨 현실의 단단한 매듭들 속에서
꿈은 작기도, 크기도 어렵다.

적어도 남들에게 기죽지 않아도 되는 어떤 것. 그것이 꿈이 된다.
그래서 대부분 대학생의 꿈은 번듯한 직장인이 되는 것이다.

무인도에서. 김씨는 정말이지 자유롭게 꿈꿀 수 있었다.
그 증거가 바로 자장면이다.

그의 자장면이 감동스러웠다면.
그 장면은 그 영화에서 가장 무거운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