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했다. 음악으로도 망가뜨리기 싫은 고요가 있었다.
그 안에서 천천히 고요를 닮아갔다.
삶은 어떤 장소와 같은 것이었다.
그 곳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사람이었다.
이름 그대로 삶이었다.
그래서 고요 안에 머무르는 것은 삶이 아니었다.
나를 반영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세상이었다.
세상에 나보다 먼저 있었던 것이 많았다.
그렇게 세상을 반영하는 것은 소문이 아니라 나였다.
나는 배운대로 살아야 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간다.
그 안에는 웃음도 눈물도 사랑도 있다.
모든 것은 배운 것이다.
심지어 선험적인 모든 것이 그렇다.
세상에서 배울 것은 너무나 많다.
그렇게 언젠가 삶은 끝나게 된다.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그렇게 반복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은 시작될 필요도 없다.
시간과 공간이 함께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존재다.
그래서 그런 것은 시작된다.
모든 의미 마저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의미란 존재하는 순간 그 자체가 된다.
결국 존재는 의미다.
신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거나, 무엇보다도 명확한 의미다.
모든 사태는 그것의 부산물이다.
와중에
나는 살아있다.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한다.
하나의 의미를 찾아낸다면
그것은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의미를 이해하려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의미와 무의미는 등가물이며
이해와 몰이해는 등가물이다.
이해는 최상의 것에 속해보았자, 곧 사물의 복제에 불과하다.
그래서 의미있는 삶을 사는 것과
의미없는 삶을 종결짓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게 자살은 문제가 된다.
자살은 그 무엇보다도 명확한 선택인데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명확할 수 없다.
그래서 자살의 선택은 영원히 섣부른 것이 되며
존속의 선택도 마찬가지다.
삶을 채우는 모든 것은 섣부르다.
죽음을 채우는 것은 없다.
그 섣부른 본질을 싫어하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은 영웅이며
영웅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미래의 의미는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고
둘 중에 무엇이 먼저 생겨난 것인지
혹은 무엇이 원인이 되는 것인지 아는 사람은 없다.
과거를 원인으로 보면 경험론자가 되고
미래를 원인으로 보면 운명론자가 되며
모든 이는 인과론자다.
인과 과는
다만 맞물려있다.
그렇게 순간과 영원도 등가물이다.
모든 것이 등가물인 곳이
세상이다. 그 안에서
선택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감정이란
오직 현재에 적응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감정과 진화는 비슷하다.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즉 '사태'는
시간 혹은 공간 안에서 벌어지며
둘을 구성하는 재료는 다르지 않다.
모든 의미는 무의미하거나 한없이 심장하며
그 무엇도 어떤 식으로든 세상을 벗어날 수는 없다.
세상은 그 자체이며
그 자체는 본질적이며
그렇지 않다면 세상이라고 부를 수 조차 없으나
세상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