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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나서/영화

아내가 결혼했다



언어. 그것은 사물을 지칭하고, 인간에게 지위 혹은 역할을 부여한다. 언어가 갖는 힘은 실로 대단해서 많은 학자들은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고들 한다.

인류는 '떼' 집단에서 '가족'집단으로 변모해왔다. 과거 '떼'집단으로 존재하던 시기. 인류의 언어가 약 6만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하니 그 이전에 해당하는 구석기, 인류의 기원에 가까운 원인들은 아마도 떼 집단 생활을 했을 것이다.

떼와 가족은 '언어역할'의 유무가 결정적인 차이점이 된다. 떼 집단에서(짐승집단을 예로 들 수 있는) 가족관계는 상당히 복잡하다. 어미는 자식을 낳고, 그 자식(A)은 다시 어미와 교미한다. 그렇게 또 다른 자식(B)이 나타난다. 아들A와 교미해 태어난 자식B는 어미에게는 아들이지만 아들A의 아들B이므로 손자이기도 하다. 아들A와 아들B는 같은 어머니 태생이므로 부자지간이면서 형제지간이다. 아비와 어미는 부부지간이면서 모자지간이다. 즉, 이러한 관계는 그 구성원을 언어로 규정할 수 없다.

그러다 언어로 인해 구성원의 역할이 규정되면서 떼 집단은 변모하게 된다. 아버지의 존재는 아들이 어미와 교배할 수 없는 조건을 만들고, 위계 권력이 나타나면서 가족간의 규율이 생긴다. 언어 개념으로 '아들, 딸, 어미, 아비' 와 같은 역할구분이 이루어지고, 협업 및 분업에도 변화가 나타난다.

이것은 축구와도 비슷하다. 초기의 축구는 속칭 공따라 축구라고 하는, 떼 집단의 축구였다. 누가 수비수이고 누가 윙어이고 누가 공격수인지 따로 정해져있지 않은, 즉 팀의 정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플레이가 이루어졌다. 그러다 포메이션이라는 개념이 적용되고, 역할분담도 세분화된다. 이렇게 역할분담이 명확해진 팀은 더 강해진다. 과거 마라도나정도의 선수면 여러명의 선수를 제치면서 골대에 공을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마라도나도 지금처럼 포메이션이 정교해진 팀을 상대로 그런 플레이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축구를 자꾸 거론 하는 것은 비로 이런 지점이 있어서다. 떼 집단의 사회보다 가족집단의 사회는 더 강했다. 그것은 적자생존에 적합했고, 역사적으로도 떼집단이 아닌 가족집단이 살아남았다. 혹은 떼집단은 가족집단으로 변모해서 살아남았다.

축구 팀도 공따라 축구 시절의 형태를 유지하는 팀은 없다. 현존하는 프로팀은 모두 언어를 통한 역할분담, 포메이션을 특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그것은 승리에 영향을 미친다.
언어로 제도화되는 규율은 이렇게 집단의 정체성과 생존력에 영향을 미쳤다. 우리 사회에 자리잡은 일부일처제. 그것도 언어가 규율하는 역할부여에서 비롯한 것이다.

"일부일처제. 그게 원칙이야."

결혼을 하겠다는 아내에게 남편은 말한다. 그게 원칙이다. 그런데 그걸 굳이 지켜야 하는 이유는 뭘까?
가만히 보면 '언어 규율'의 정당성을 떠받치는 근거는 상당히 허술하다. '원래 그런 거니까.' 라는 답변 외에는 결정적, 합리적인 대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러한 언어규율은 '신화'다. 장진 감독의 '아는 여자'에서 표현하는 바도 같은 맥락이다. 9회말 아웃을 잡을 찬스에 관객에게 공을 던지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도 역시 그러했다. "원래 그렇게 하면 안되는거야. 그냥 안돼."

파렴치한 질문이지만, '왜 효도해야 하는가?'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도 어렵다. 인간은 지구상에 살아가는 동물이다. 수많은 다른 동물들은 '효도'를 행하지 않고도 지구상에 적절한 개체를 확보하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왜 굳이 인간만은 효도를 해야하고 위계질서에 순종해야하는가. 나 역시 부모님께 효도하고싶다. 하지만 그 이유는 나의 뼛속깊이 '언어역할'이 습관화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효도는 '아들이니까 원래 해야하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규율의 신화는 자연과 충돌을 일으키기도 한다. 보편적인 것은 일부일처제에서 발생하는 불륜문제다. 성욕이란 신(혹은 자연)이 부여한 인간생식능력의 핵심이다. 그것은 중요하다. 지구상에 인간이 번성하는데 있어서 성욕은 지능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일부일처제의 규율 앞에서 성욕은 억압받는다. 자연과 논리적 규율은 상충된다. 바람피지 않으면 자연의 욕구가 탄압받고, 바람을 피면 논리적 규율이 파괴된다. 둘 다 인간이 감당하기엔 버거운 것들이다.

그래서 '불륜'은 언제나 문학작품, 가사, 영화 의 주제였다. 그리고 이러한 작품은 너무도 많아서 불륜을 다루는 대부분의 작품은 3류다. 아내가 결혼했다. 이 작품 역시 특이한 불륜을 다룬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은 그래도 2류는 되지 않나 생각한다. 자연과 규율의 단순충돌이 아닌, 규율(결혼A) vs 자연욕구(아내의 사랑) vs 규율(결혼B) 의 삼중갈등은 단순한 불륜과는 차이가 있다.

이 작품은 그런 점에서 욕구를 매개로 언어규율과 언어규율을 충돌시킨다. 나는 그런 점이 재미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제도와 자연의 충돌이 아니다. 그리고 제도와 제도의 충돌은 기묘한 관계를 낳는다. 바로 한 아내를 둔 두 남편의 관계다.
아내는 아내라 부른다. 아버지는 아버지라 부른다. 매형, 당숙, 시누이, 시어머니 등 모든 역할에는 명칭이 있다.
그런데 그 두 남자의 관계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현존하는 가족시스템에 존재하지 않는 관계.

"형님~ / 형님이라고 부르지좀 마라."

이 대사가 자꾸만 반복되는 것은 우연도, 군더더기도 아니다. 이 대사는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모든 것은 압축시킨 엑기스다.
기묘한 충돌에서 발생한 기묘한 가족관계. 역할분담이 얽히면서 태어난 '지원'이. 졸지에 아빠가 둘이 되어버린 아이. 재미있게도, 그 아이의 이름은 축구사 최고의 멀티플레이어 '지단 넘버 원' 이다.

멀티플레이어는 한가지 역할에 종속되지 않은 존재다. 그들은 여러 역할을 두루 겸하면서 팀을 변화무쌍하게 만들고, 강하게 만든다.
물론 이 영화에서 '멀티 시스템'이 미래의 가족을 대변하거나, 현존하는 가족시스템의 문제를 보완해줄 대안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상의 다양한 집단은 축구와 비슷하게 변모해왔다. 떼 집단에서 포메이션을 강조하는 집단. 그리고 다시 여러 포메이션의 섭렵을 중시하는 집단. 이러한 것은 관료제의 발전과도 유사하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선택은 어느정도는 설득력이 있다고 보아도 될까.
이 시대에, 언어철학과 가족, 멜로, 사랑을 다루면서 이러한 논점을 가진 영화는 나올 때가 되었고, 이 영화는 그 중 하나다.

그러나 마냥 이 영화가 편하지만은 않았다. 이 영화는 아직은 편할 수 없다. '나는 팻'이라는 케이블방송이 어느정도 사회를 반영하고는 있지만 편하지 않은 것 처럼, 이 작품이 담고있는 이야기는 나름 재기발랄하고, 지적인 유희도 던져주지만 역시나 나는 "내 여자다 이새끼야" 라는 대사가 더 공감간다.

이 영화의 한계이자 강점인 것은 '가벼움'이다. 이 영화에 드러나는 갈등양상은 코믹하게 마무리되면서 가볍다. 그것은 충분히 무거워야 하는 대상일수도 있으므로 의도적인 상업화 및 오락화로 읽힐 수도 있다.

그리고 두 결혼의 충돌이 두 가족에게 끼치는 영향을 심각하게 표현하기 시작한다면 작품의 구성은 훨씬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쉬운길을 선택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그리고 단순한 불륜의 멜로물이 아니라는 점은 강점이다. 어느정도는 철학적이고 그래서 지적인 유희가 들어있다. 축구포메이션과 가족을 자꾸만 병치시키는 것은 영리한 선택이고,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