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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나서/영화

파프리카


'꿈'이라는 것이 갖는 의미는 심장하다. 그것은 잠자는 인간의 정신활동의 결과물을 뜻하기도 하고, 현실의 한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모든 생명의 염원(어린시절에는 '장래 희망'이라고 부른다.)을 뜻하기도 한다.
모든 사람은 꿈을 먹고 산다. 동시에 수면을 취하지 않으면 죽게된다.
따라서 인간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필연코 꿈에 의존하게 된다.

인간은 이중적이다. 으례 '나 다운 나'로서 살아가길 원하지만, 반대로 '현재의 나와 다른 미래의 나'를 꿈꾸기도 한다. 지성인은 야성인을 꿈꾸고, 반대로 야성인은 지성인이기를 꿈꾼다. 천재는 바보의 순수함을 꿈꾸고, 바보는 천재를 동경한다. 그 결과 꿈에서의 자아와 현실에서의 자아는 분열되기 쉽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리라. 그리고 곤 사토시 감독도 그러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인 '파프리카'는 분열된 주인공의 한쪽이다. 그리고 모든 등장인물은 꿈 속에서 '또다른 자신'을 만나게 된다.

곤사토시가 보여주는 '꿈의 현실화'는 다소 진지하다. 굳이 미야자키하야오와의 차이점을 꼬집자면, 미야자키는 '꿈과 현실이 하나되는 세계'를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곤 사토시는 다르다. 곤 사토시는 현실에 방출되어버린 꿈이 얼마나 위험하고 혼잡한지를 말한다.
이 작품의 네러티브는 거의 '인간간의 꿈이 직접적으로 혼선을 이루는 상황'을 다룬다. 그리고 꿈의 혼선은 파괴와 혼란으로 나타난다.

사실 그렇다. 현실에서 사업가의 꿈이 과도하게 달성될 경우, 환경오염과 균등분배는 포기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예쁜 산천을 꿈꾸는 자들의 꿈은 침해받게 된다. 정치인의 꿈이 과도하게 달성될 경우, 이데올로기의 다양성은 포기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많은 역사적 불상사의 씨앗이었다.
세상은 공유하게 되어있고, 꿈은 세상을 소모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개개인의 꿈은 어느정도 불협화음을 갖는다.
이 작품에서 서로 다른 개인의 꿈은 서로를 침해하면서 파괴한다. 이 '파괴'는 그런 그런 맥락에서 현실적이며 설득력있다.

미야자키의 작품에서는 너무나 순진하기에 행복하지만, 그 결과 '어리석어버린 불만감'이 있어왔다. 헌데 파프리카는 그 어리석음을 커버하고 있어, 그런 점에서도 현실적이다. 이 작품의 많은 부분을 꿈의 세계의 화려한 퍼레이드에 할애했다. 바로 이 것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닮아있지만, 꿈을 논하는 방식은 정 반대이므로 두 작품은 대조된다.

곤사토시의 지난 작품 중 '퍼팩트 블루'에서 '뚱보 매니져'의 꿈을 돌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뚱보 메니져는 여주인공의 화려함을 동경한 나머지, 착란증 증세를 보이게 된다. 그 착란증이 의미하는 바는 '매니져의 꿈이 현실에 무방비로 방출되는 상황'이다. 인간의 순수한 꿈. 그것은 자칫 방출되어선 안될 가연성물질이기도 한 것이다. 광적인 꿈의 방출과 그 위험성. 그것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것은 퍼팩트블루와 파프리카의 공통점이다.

이 작품은 '공각기동대'의 고스트해킹이 지적하는 문제점을 비슷하게 보여준다. 인간 내면에 대한 인위적 조작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꿈을 간섭하는 기계가 보여주는 '재난'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아쉬운 점이 있다. 꿈의 내용은 무작위이다. 즉, 우리는 꿈의 내용을 선택, 제어할 수 없다. 작품처럼 DC미니가 만들어지면 그 무작위성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그에 대한 상실감은 나타나있지 않아 허전하다. 공각기동대는 '기억의 고유성'에 대한 상실감을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어 좋았는데, 같은 맥락이 충족되지 못해 파프리카의 완전성이 아쉽다. 그것은 더없이 이 작품에 적합하면서도 재미를 가져다 줄 이야기 꺼리이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은 또 있다. 파프리카의 네러티브는 다양한 이야기를 갖고있어 풍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릴이 없다. 곤 사토시는 퍼팩트블루에서 매력적인 스릴러(혹은 공포)를 표현하는데 성공한 바 있다. 게다가 파프리카에서 꿈들이 뒤엉키는 불안함은 '공포'와 대단히 궁합이 잘 맞아보인다. 그러나 의외로 장면들은 공포스럽지 않다. 곤 사토시가 공포를 잘 이해하고 있는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공포가 약하다는 점은 의아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관객의 정신을 마구 생동하게 하는 멋진 기재 아닌가. 만일 이 영화의 곳곳에 공포가 숨어있었다면, 나는 이 영화에 완벽하게 매료되어 넉다운 되었을 것이다.

몇가지 불만을 집어내긴 했으나, 이 영화는 대단히 감동적이고 아름답다. 나는 이야기의 여주인공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고, 형사 아저씨의 로망에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꿈은 화려하면서도 짜임새있는 장면으로 멋지게 표현되어있고, 그 자체만으로도 눈은 즐겁다. 이렇게 자유로운 영상은 역시나 (영화보다는)애니메이션의 영역이고, 이 작품은 멋지다.

나는 이 작품이 주인공들의 컴플랙스를 극복한 후 어떤 대단원을 보여줄지 궁금했다.

'꿈꾸는 어린이'를 보기위해 '어른 한 장'을 주문하는 사나이.

어떠한가. 굳이 말하자면, 모든 시대의 모든 어른들은 끊임없이 '어린이'를 꿈꾸지 않았던가. 어린이는 모든 어른의 추억이자 이상이다. 그래서 필연코, 늙어가는 모든 인간의 '로망' 아닌가.

과연 이런 장면을 젊은 감독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만일 가능하다면 그것은 중년에 대한 흉내에 불과하다. 곤사토시의 연배는 이 장면에서 짧은 여운으로 빛난다.

나는 이 작품의 라스트씬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것은 자극적이지 않았지만 소름돋는 장면이었고, 형사아저씨의 인간미를 오래도록 남게 만든다.

몇가지 아쉬움은 있어도, 그것은 어른이 되어가는 나의 까다로움에 불과하다. 이 영화는 수려하다. 나는 오래도록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