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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튼 생각

art?

음악에는 '화음'이라는 것이 있다.

사람은 모든 것에 반응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글자와 글자가 다르다는 것을 변별할 수 있는 이유도
사람이 모든 것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A 라는 글자를 보고 B라는 글자를 보았을 때, 사람든 두번 다르게 반응했고, 이 반응은 크게 눈에 띄는 현상은 아니지만, 두 다른 반응 덕분에 A와 B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소리에도 사람은 당연히 반응한다. 그런데 본능적으로 하나의 소리를 들었을 때, 사람의 마음 속에는 '빈공간'이 생기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빈공간을 채워줄 다른 소리는 또한 존재한다.
그 빈공간을 채워줄 다른 소리를 듣는 순간 사람은 만족감을 느끼고, 그 소리들로 인해 다시 다른 곳에 빈공간이 생긴다.
순차적으로 생기는 빈공간을 순차적으로 채워줄 소리를 순차적으로 배열해보면, 그것은 '화음'이다.
이것은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가진 공통속성이라, 장조의 화음을 들으면 다소 들뜬기분, 단조의 화음을 들으면 차분하거나 슬픈 기분을 약간 느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음악은 감정을 맛보게하는 통로다. 비슷한 논리는 소설과 언어 의미에도 적용될 것이다.
비슷한 설명은 미술의 색상배치에서도 찾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인간 취향의 모든 면은 관계있어보인다.

신기한 것은, 이런 감정은 학습된 것과 학습되지 않은 것이 혼재한다는 것이다. 화상을 입은 경험을 가진 사람이, 불에 데여 고통스러워하는 타인을 보았을 때, 학습된 고통의 기억은 타인의 상처를 통해 재현되고, 고통과 동정의 감정이 나타난다. 학습된 감정이다.슬피 우는 여인을 보았을 때, 나의 학습된 슬픔들은 다시 나타난다. 이런 모든 것들은 학습된 감정이다. 그것은 나의 고통, 나의 눈물과 비슷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비롯한다.
그런데 단조의 음악은 어떠할까. 그게 슬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울분과 호환성을 이루는 것은 타인의 울분 뿐만이 아니라, 특정 소리의 배열도 해당한다.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음악을 접한다 하더라도, 그 음악이 사람의 통곡과는 전혀 닮아있지 않다 하더라도, 장단조에 대한 학습을 한 적이 없더라도. 슬픈 음악이라는 사실은 알게 된다.

인간의 감정은 그래서 더 이해하기 힘들고, 설명불가능한 아름다운 것으로 보인다.
작곡은 보통 논리적인 결론이 아닌 순간적인 발상에 의해 이루어진다. 작곡가는 어느 순간 아름다운 선율을 떠올리고, 그것을 녹음하던지 기록한 후, 곡으로 완성한다. 독창적인 음악일 수록, 어디서 들어본 적 없는 새로운 것인데, 그런 뮤지션들의 '아름다울 것'이라는 추측은 인류역사상 많이 적중되어온 것 같다.
말하자면 현존하지 않는 선율의 아름다움을 예측하는, 미래예측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회화, 시, 소설, 음악 등의 창조행위는 현존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예측하는 미래 예측행위라고 규정해도 될까.
그들은 미래에나 존재할 아름다운 어떤 것을 현실화시키는 일을 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측면에서는 시간을 초월해있다.
시간을 초월하려 한다는 특성은, 예술이 가진 한 측면으로 보인다.
헤겔은 회화가 2차원적인 평면에 입체를 표현하기 때문에 차원을 초월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면 예술은 모든 차원을 초월하려한다.


2008/07/15 14: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