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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남자 - 악마

어릴 적이었을까요.

몇 살때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3살이거나 4살이거나 5살이거나 6살이거나

그 언저리의 시간이 흘러내려갈 때 쯤이겠지요.

 

나는 조용히 전봇대 아래에 쪼그려 앉아있었습니다.

동네 조용한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고,

나는 아버지가 사주신 야구모자를 쓰고, 운동화를 구겨신었었고,

약간은 사이즈가 작은 티셔츠를 입고있었고,

혼자 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어떤 남자가 내 곁으로 걸어왔습니다.

나는 가만히 그 아저씨를 쳐다봤는데

위 아래로 까만색 옷을 입고 까만 중절모를 쓴 그 남자는

내 바로 옆에 까지 왔다가

나를 향해 씩 웃더니 발길을 돌려 가버렸습니다.

 

그 남자에게서 풍겨온 냄새를 조금 맡을 수 있었고,

그 남자가 흘리고간 발걸음 소리도 조금 들을 수 있었고,

그 남자의 차가운 웃음을 조금 볼 수 있었고,

그 남자에게서 불어온 짧은 바람들이 조금 내 볼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 조금조금의 것들은

절대로 잊혀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남자와 조우한 그날부터,

나는 바보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상하게도 내 혀는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았고,

내 손가락들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뻗어가지 않았습니다.

머리카락이 자라날 힘을 잃어서 듬성듬성 빈 공간이 생겼고

입술과 볼이 제때 움직이지 못해서, 나도 모르게 침이 흐르곤 했습니다.

머리가 나빠져서 사람들의 말길을 알아듣지 못했고

한 가지에 집중을 할 수 있는 시간도 짧다고 했습니다.

 

병원이란 병원엔 모두 가 보았지만

그 어떤 의사도 나를 원래대로 돌려줄 수 는 없었던 겁니다.

그 어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도 간호사도

그 까만 옷을 입은 아저씨보다 강한 사람은 없었던 겁니다.

그 남자를 만난 이후로

나는 바보가 되어버렸습니다.

돌이킬 수 없이, 어쩔 방법도 없이, 왜 그렇게 되어야 했는지 알 수 없이.

 

 

멀리서 지켜보는 것 만으로는 가슴을 달랠 길이 없어서

나의 순정은 그래도 18세의 사춘기 막바지에 있었기에

그녀에게 멋있게 프로포즈를 하려고 했었는데

나는 침을 흘리고 말았고,

쓰다듬어주려다 그녀의 어께를 밀치고 말았고

그녀의 치마에 내 침이 묻고 말았고

사과의 말을 하려고 했지만

한글로 받아쓸 수 없는 신음만 쏟아내고 말았고

내 손톱사이에는 까만 때들이 잔뜩 묻어있었고

그 더러운 것들을 나는 씼고 갔어야만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그녀에게 변명을 하려 흔드는 그 순간에야, 내 손가락 사이에 때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래서 그녀는 무서워 도망치며

울고

그랬던 겁니다.

 

그녀에게 사과를 하기 위해 편지를 썼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혀가, 나의 손이, 나의 입술과 볼이 잘 움직여주지 않고

내 머리가 너무 나빠서 말귀를 못알아 듣고

머리가 듬성듬성 빠져버린 이 모든 것이

그 까만남자 때문이었다고.

내가 바보가 된 것은 그 남자 때문이라고.

혹시나 그 남자를 만나게 되면 조심하라고.

 

하지만 나는 그 편지를 전해줄 수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내가 그녀 가까이 가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내게 손가락질 했고

내 뒷 호주머니에는 꼬깃꼬깃한 편지가 들어있었습니다.

 

나는 영리하지 못해서 그녀에게 접근할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나는 세련되게 사랑을 전할 방법도

절절하게 사과의 마음을 전할 방법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나는 멀리서 그녀가 자전거를 타고다니는 것을

훔쳐볼 뿐이었고...

그렇게 스물다섯살이 될 때 까지

그녀가 '시집'을 갈 때 까지

내 뒷 호주머니에는 편지가 들어있었던 겁니다.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그녀가 감기에 걸려 몸져 누워있던 밤.

나는 멀리 그녀의 창문을 바라보며 그녀가 감기에서 낫기만을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감기가 폐렴으로 변하고

수은주가 40도를 웃돌 때

그녀의 폐를 부숴버릴 것 같은 기침이 몰아칠 때

그녀의 남편이 아무 방법을 찾지 못하고 물수건만 적실 때

나는 그 전봇대 아래서

낯익은 냄새를 맡았다는 것을.

낯익은 바람이 볼을 스쳐갔다는 것을.

낯익은 발걸음이 들려왔다는 것을.

낯익은 남자가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았던 것을.

'그'를 다시 만났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내가 그 까만남자를 부둥켜안고 늘어졌던 것을.

다시는 만나고싶지 않았던 그 남자를

내가 껴안고 넘어졌던 것을.

온 몸의 털이 벌떡 일어설 만큼 무서웠지만

그렇게 했었다는 것을.

그 남자가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만은

내가 막아야 했었다는 것을.

그날 밤, 나는 동네사람들의 몽둥이 찜질보다도

동네 총각들의 발길질에 찍힐 때 보다도 더

많이 아팟다는 것을.

나는 이미 서너살때 부터 망가져 있었고

조금 더 망가진들 세상에 변할 것은 없었으며

그녀는 도망갈 곳이 없었기에.

 

간밤에 그녀의 병이 완쾌되고

밤새 그녀를 간호한 사위는 그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었고

남편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더욱 깊어지게 되었고

까만 남자를 껴안았던 나는

이제 손 발이 썩어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소위 문둥이가 되어버린 나는

마을에서 격리되어

그녀의 창문을 바라볼 수도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녀의 집 앞에다

내 편지를 두고 왔지만

그녀가 우연히 편지를 읽는다 해도

그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을겁니다.

아무도 알 수 없을 겁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까만 남자를 두 번이나 만난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나 뿐이라는 것도

아무도 알 수 없을 겁니다.

 

그래도 그녀를

정말로 많이 사랑했던 것 만은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 편지에

사랑한다고 써넣는 것을 잊고 만 것도

머리가 나빠서일 겁니다.

 

 

 

 

fin